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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훔친 이야기』, 세 장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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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쒀서 さる(원숭이)에게 준다고 고생하신 세 장수>

시바 료타로의 소설 『나라 훔친 이야기』를 읽고 언젠가는 한 번 포스팅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차에 문득 생각이 나서 만드는 글. 그냥 전반적인 인물의 일대기에 대한 간략한 썰이 되겠다. 굳이 제목을 붙여보자면, 쌔빠지게 고생은 해놓고 결국 원숭이와 너구리에게 천하를 넘겨준 세 사람의 이야기가 되겠다.


1. 쿄토의 기름장수에서 미노의 살모사가 되기까지, 사이토 도산(斎藤道三)

 


<두 갈래의 파도를 형상화한 도산의 깃발>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이토 도산의 정확한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첫 등장 이름으로는 젊은 시절 묘카쿠지(妙覺寺)에서 받은 법명인 호렌보(法蓮房). 이후에도 이름을 자주 바꾸면서 마쓰나미 쇼쿠로(松波庄五郎), 니시무라 간쿠로(西村勘九郎), 나가이 도시마사(長井利政)등 생애에 걸쳐 13번이나 이름을 바꾼다. 사이토라는 성을 쓰는 것은 텐분 5년(天文 5年, 1536)이었고, 텐분 23년(1554)에 마지막 이름인 도산을 쓰게 되었다. 그야말로 이 사내에게 이름이란 껍데기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이 재미있는 점은 권모술수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무예(당시에는 그저 싸우는 도구에 불과했던 창을 연마하여 창술을 검술처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점이 특이하다)에도 능했고 출신이 공가(천황가)와는 관련이 없음에도 공가의 예법에도 능했으며, 시가와 한시 등, 그리고 건축계획에도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만능인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나. 이런 능력을 가졌으니 그저 교토의 기름이나 파는 장수에서 일본 중부 지역의 최대 곡창지대인 미노 지역을 빼앗고 센고쿠 다이묘로 등극할 수 있었겠지. 물론 미노 지역의 슈고였던 도키 가문이 멍청했던 점도 한몫 했겠지만.

하지만 사이토 도산의 가장 큰 약점은 출신이 바로 일반 상인이었다는 점이었으니. 도산이 미노지역을 탈취하기까지는 무려 2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저 군대를 조직해서 옆동네를 점령하는 이런 수준이 아니라, 교토의 상인으로부터 시작해서 뇌물공세를 통해 미노의 슈고 가문에 접근하고 신분 상승하고, 도키 요리요시(土岐頼芸)를 슈고로 앉히기 위해 공작을 하고, 또 이후에는 멍청한 요리요시를 몰아내고 본인이 미노를 탈취하기 위해서 그 얼마나 많은 꾀를 부렸던가. 그 와중에 대대적인 숙청도 있었고 덕분에 얻은 별명이 바로 살모사가 되시겠다. 그래놓고 겨우겨우 빼앗은 미노 지역을 배다른 아들내미 사이토 요시타츠(斎藤義龍, 도키 요리요시의 아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에게 반격당해 의절하고 아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한 비운의 캐릭터 아아. 소설에서는 그와 마음이 잘 맞았던 옆동네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미노 지역의 상속권을 양도했다는 말도 있던데, 뭐 도산의 딸 노히메(본명은 帰蝶, 노부나가가 미노 출신의 아내라고 계속해서 노노 부르다보니 원)가 노부나가에게 시집갔으니 실제로 양도하고 뭐고 이런 건 아니지만 좋아했던 것은 맞을 수도.

 
<자기의 두 제자인 미츠히데와 노부나가의 싸움을 도산은 지하에서 어떻게 봤을까.>

   산이 이후의 역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바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가르친 것이다. 처음 미노에 도착해서 갖은 뇌물공작과 회유를 통해서 지역 호족들과의 관계를 넓히고 있을 때 가장 마음이 맞았던 사람이 바로 아케치 요리타카(明智賴高)인데, 이 요리타카는 바로 미츠히데의 파파가 되시겠다. 미츠히데가 어렸을 적부터 도산이 총애해서 자주 불러서 많은 것들을 가르쳤다고 하니 직속제자쯤 되겠네. 덕분에 미츠히데 역시 무예와 예술, 공가의 예법 등에 능한 다방면의 능력자로 성장했고, 이후에 인재욕심에 불타오르던 노부나가를 도와 노부나가의 상락(上洛, 지방 다이묘가 교토에 올라가서 쇼군을 뵙는 일종의 무력뽐내기용)과 패권의 성립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원래부터 노부나가와 기질이 많이 다른지라 잦은 충돌을 겪었고, 결국 혼노지(本能寺)에서 노부나가에게 받은 굴욕을 일소하고자 반란을 일으켜 그를 살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의 사태는 뭐 다들 알듯이 원숭이(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물리치고 패권을 잡게 되지만.

도산과 노부나가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은 다이묘인지에 대해서는 논하기가 어렵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미 노부나가는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가 오와리의 패권을 확립해 놓은 상태에서 출발한 다이묘고, 도산은 무일푼 상태에서 미노의 다이묘가 되었으니 이건 마치 100m 달리기에서 노부나가는 50m 지점에서 스타트하고, 도산은 150m 밖에서 스타트 하는 것과 같은 불공평한 게임이라고 할 수 밖에는. 덕분에 미노라는 정말 좋은 지역을 손에 넣었지만, 나이가 너무 많았던지라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고 웅크리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란.


2. 오와리의 멍청이에서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으로, 오다 노부나가


<손에 쥔 부채로 미츠히데의 넓은 이마를 때렸다던 노부나가. 왠지 머리를 저렇게 까고 있으면 한 대 때려보고 싶을꺼 같긴 해. 게다가 미츠히데는 이마가 넓었다잖아!!>

   뭐 노부나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소설과 글들에서 설명하고 있으니. 그냥 도산의 제자(?)이자 노히메의 남편이었던, 그리고 도산의 직계제자인 미츠히데와의 주종관계에서 노부나가에 대해서 써내려 가보면 참 뭐랄까 피도 눈물도 없는(그렇다고 희대의 악인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하지만 노부나가가 살았던 시대와 그가 처한 위치를 생각해보면 또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드는 개혁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노부나가가 한 짓이 잘했다는건 아니고.

워낙에 어릴적부터 별난 짓을 많이 하고 돌아다녀서 오와리의 가신들은 이 녀석이 다이묘가 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이는 옆동네에 있던 도산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당연히 옆동네에 멍청한 다이묘가 들어서면 뺏기 수월할테니까. 덕분에 어릴 때의 별명이 오죽하면 멍청이였겠는가. 하지만 아버지인 노부히데는 아들의 ‘멍청한 짓’을 그대로 인정해 줬었고 노부나가도 이를 잘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를 정말로 좋아했던 흐뭇한 부자지간이었다. 다른 사람이 모두 자기를 믿지 못했음에도 아버지만이 나를 믿어준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향을 던졌다는 일화는 지금으로 따지면 완전 버르장머리 없는 패륜아(?!)로까지 낙인찍을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 봐라.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등을 돌렸는데 유일하게 믿어주던 한 사람이 자기 곁을 떠났을 때의 상실감과 허무함, 비통함, 슬픔 등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도산과 관련해서는 옆동네에 살고 있는 다이묘라는 것과 도산의 딸을 정략결혼으로 맞이했다는 정도밖에는 더 이상의 관계를 지을 수는 없겠지만, 소설에서는 노부나가가 장인을 좋아했었고, 장인 역시 단순한 멍청이로 알았던 이 젊은이를 한 번 보는 순간 단순한 멍청이가 아니라 실은 굉장한 인물임을 간파하고 사랑했었다는 참 동화같은 스토리다. 이 둘이 처음으로 대면한 것은 텐분 22년(1553), 미노와 오와리의 국경지대에 있는 쇼토쿠지(正徳寺)에서였다고 하는데 이런 일화가 전한다. 먼저 쇼토쿠지에 도착해서 노부나가를 기다리고 있던 도산은 그래도 다이묘 대 다이묘의 만남이라 의관을 정제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오는 노부나가가 익히 들어온 ‘소문(멍청이)’과 같이 옷을 대충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오고 있는 걸 보고 자기도 편하게(어쨌든 사위잖아) 갈아입고 기다렸다. 그런데 웬걸, 분명 말을 타고 올 때는 개판이었던 옷차림이 절에서 정식대면을 할 때에는 굉장히 말끔하게 갈아입었단다. 한마디로 노부나가가 도산을 떠봤다는 사건이지만, 이 일을 통해서 도산은 이웃의 다이묘이자 사위를 다시 평가하고, 장차 미노가 노부나가에 의해서 빼앗기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노부나가 역시 도산의 인물됨을 존경하여 이후로도 도산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고, 특히 도산이 의절한 요시타츠랑 최후의 싸움을 벌일 때 본인의 전황이 좋지 않음에도 울부짖으면서 장인을 도우려고 군대를 이끌던 모습에서는 캬. 이래서 딸을 잘 봐야해(응?).

이후의 역사는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당시에 상락 1순위로 꼽히던 최대세력인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물리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곧이어 도산의 사후 어수선하던 미노를 공략해서 중부 최대의 곡창지대인 오와리-미노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나이(畿內)로 진출하여 상락 후에 당대 최강의 군대라던 다케다(武田) 기마부대의 서진(西進)을 막아내면서 최고의 권력자가 된다. 이 와중에 군대의 지휘 뿐만 아니라 천황가 및 쇼군가와의 공무 처리 등 내정 분야에서 큰 활약을 해준 것이 바로 도산의 제자였던 아케치 미츠히데였다. 사실 노부나가의 제장들은 전투에서는 큰 공을 세웠을지 모르나 내정 분야에서는 뛰어난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미츠히데는 노부나가가 인재욕심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매력적인 인물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속설에서도 나오듯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했던 미츠히데와 노부나가는 자주 충돌이 있었고, 결국 당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모리(毛利) 가문과의 싸움에서 힘겹게 되자 원군을 요청함에 따라 미츠히데에게 원군을 이끌고 가라고 명령했다가, 미츠히데가 이 군대를 가지고 혼노지에 묵고 있던 노부나가를 침에 따라 역사상 유명한 혼노지의 변이 성립하게 되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혼노지의 변은 도산의 두 제자가 서로 물고 뜯은 싸움이 되겠다. 결국 노부나가는 혼노지에서 자결했다고 하는데, 왜 그런 얘기 있잖아 역사상 통틀어서 꼭 한 자리 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세계 각지에서 등장했다는 이야기처럼 노부나가도 이 때 죽지 않고 살아서 여러 군데에서 출몰했다는 야그가 있긴 한데, 노부나가의 성격으로 봐서는 그냥 깔끔하게 여기서 죽었을 듯 암암.


3. 쇼군가를 사랑한 로맨스 가이, 금귤머리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그림에는 제대로 표현이 안되는데 이마가 참 넒었단다. 마치 쌈디처럼? ㅋㅋㅋ>


   난 처음에 아케치 미츠히데라는 성과 이름 자체가 자기가 워낙에 능력이 출중하다보니 ‘밝은 지혜에 빛나는 능력’이라는 예명으로 지은 건줄 알았다. 근데 소설에서 아케치라는 가문 자체가 원래 미노 지역의 유력 호족 가문이었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아 원래 성씨가 저거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왠지 잘난 맛에 사는 거만한 인물이라는 환상이 벗겨지면서 전통을 지키고 쇼군을 지키려 했던 전국시대의 로맨스를 지닌 이 인물이 좋아졌다.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모르겠다만, 어쨌든 도산이 미츠히데의 능력을 아껴서 많은 것을 전수해줬단다. 도산이 아들 요시타츠와 벌인 전투에서도 미츠히데는 도산의 곁을 지켰다고 하니 이 사람 뭔가 드라마를 아는 사람이야. 눈물 좀 쥐어짤 줄 아는 사람인데? 이후에는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 가문을 잠시 섬기는데, 이 시절에 바로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만났다. 이 요시아키로 말하자면 잠시 당시 쇼군가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 때는 아직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시절로 11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가 당대 최고의 악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에게 암살당한 상태, 즉 쇼군 자리가 공석이었던 상황이었다. 요시아키는 바로 11대 쇼군 요시테루의 동생으로 원래는 불문에 있었으나 쇼군가를 섬기던 가신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 후에 유사이幽斎로 이름을 바꿈)와 미츠히데의 도음으로 몸을 빼돌려 에치젠의 아시카가 가문에 피한 뒤 노부나가의 도움을 받아 무로마치 바쿠후의 12대이자 마지막 쇼군으로 등극했다. 이 과정에서 미츠히데의 노력은 그야말로 이제는 교토에서도 끗발 못날리는 레벨 1짜리 몬스터와 같은 허약함을 갖춘 쇼군가를 그래도 존중하면서 일으켜 세우는 그야말로 눈물없이는 못보는 전통을 수호하는 알흠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이후에 쇼군과 노부나가가 대립하게 되면서 미츠히데는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요시아키를 자기가 몰아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고, 노부나가는 쇼군에 대한 전통 이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이 결국 무로마치 바쿠후를 무너뜨렸다. 게다가 노부나가 자신을 마치 악마로 묘사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세력을 무자비하게 토벌하는 과정에서 불교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0.1g도 찾아볼 수 없는 행동들(승려들과 그곳에 거했던 여자, 어린 아이 할 거 없이 다 죽인다던가, 아니면 절의 나무나 돌을 빼서 성을 짓는데 쓴다던가 등등)을 곁에서 보면서, 어려서부터 아주 바른 생활을 지향했던 미츠히데는 노부나가에 대해 염증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주군의 성격에 따라 바로바로 행동을 바꾸는 약삭빠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때는 아직 하시바 히데요시)와는 달리, 아첨을 모르는 성격의 미츠히데를 노부나가 역시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저 미츠히데의 다방면에 능통한 능력을 아낄 뿐이었지, 그런거 없었으면 20년 전 일도 캐물어서 가신을 쫓아내는 노부나가가 미츠히데를 가만 놔뒀겠나. 눈에 가시지 뭐 -_-... 그림에서도 설명했지만, 미츠히데는 이마가 좀 시원했다(?)고 하는데, 혼노지의 변이 있기 전에 노부나가와의 불화를 겪은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부채로 이마를 얻어맞았다는 일화도 있는 걸로 봐서는 둘 사이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음을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어쨌든, 이러 저러한 일들로 불화가 쌓인 이 둘은 결국 혼노지에서 대결했고, 홀홀단신이나 다름없었던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의 공격을 받아 장렬히 자결했다. 천하는 미츠히데의 것이 될 줄 알았으나, 때마침 모리를 공략하던 히데요시가 이때다 하고 군대를 재빨리 돌려서 미츠히데와 맞섰고(山崎の戦い, 야마자키 전투), 결국 미츠히데는 이 전투에서 패해서 도망가던 도중 토착 농민(이라고 쓰고 산도적이라 읽는다)의 손에 목베임을 당하는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했다. 당시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과 대립하면서 빗츄(備中)의 타카마츠성(高松城)을 공격하고 있다가 노부나가가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과 10일도 안되서 200km의 거리를 대군을 이끌고 달렸는데, 이를 쥬고쿠 오가에시(中国大返し)라고 부른다. Koei의 게임 「신장의 야망13:천도」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문 기술이 이 오가에시인데, 습득하면 전 병과의 기동력이 +2가 된다. 오오 +_+.

여튼, 미츠히데 역시 미노의 유력 호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주인 섬기기에 마가 끼었는지, 처음에는 도산을 섬기다가 아들과의 대립에서 져서 떠돌아다니게 되고, 그 다음으로는 아사쿠라 가문을 섬기는데 이 아사쿠라 가문은 미츠히데의 능력을 별로 높이 사지를 않아서 그저 그런 따분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후에 쇼군을 옹립했지만 말했듯이 레벨 1짜리 쇼군이 뭔 위엄이 있겠나. 게다가 노부나가를 섬기는데 이 거만한(?) 다이묘는 그저 부려먹기만 하지 제대로 대우해주지도 않는 상황에서 결국 혼노지의 변을 성공했지만 마지막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으니 불쌍한 인간이로고. 쯧쯧. 도산이 살아있었더라면 이 두 제자가 죽는 모습을 어떻게 봤을까나.

한편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키게 된 이유로는 여러 가지 설이 등장하는데, 1)본인이 기독교인인데 기독교를 배척하는 노부나가 때문에 미워서 그랬다(이 부분은 미츠히데의 딸이 유명한 호소카와 가라샤라고 아예 세례명을 이름으로 썼다는 점에서 결정적 이유는 아니지만 +@로 취급할 수도), 2)본인이 천하통일의 야망이 있었다. 3)노부나가가 옛 가신들을 쫒아내는 걸 보면서 본인도 쫄아서. 4)아직까지 살아있던 망한 쇼군 요시아키가 지령을 내렸다. 5)노부나가가 아예 천황까지도 엎으려고 하자 천황가에서 모반을 독려했다. 6)무리해서 시코쿠를 점령하라는 명령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 등등의 수많은 설이 있다. 그만큼 미츠히데의 모반 자체가 의외라는 평가가 될 수도 있고 말이지.


여튼 이 세명의 공통점이라면, 원숭이(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너구리(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넘겨주기 위해서 열심히 행동했다고 평을 내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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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의 연구방법-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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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類證 : 비슷한 예를 묶어서 논증하라


이를테면 단군은 3과 5의 數로써 새로 온갖 규칙을 정하였는데 부여의 五加와 고구려의 五部와 백제의 五方과 발해-고려 내지 契丹(遼)-女眞(金)의 五京은 단군의 정치제도에서 나온 것이고, 신라의 五戒(事君以忠, 事父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는 단군의 윤리를 전한 것이며...(中略)...


이처럼 같은 類를 따라서 증명할 수 있으니 이것이 類證이다.


(2) 互證 : 상호 비교하여 논증하라


箕子의 <洪範>을 <尙書>에서는 "夏禹氏가 전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吳越春秋>에서는 "夏禹가 治水할 때에 塗山에서 玄토使者로부터 <中經>을 받았다"라고 하였으며, <古記>에서는 "단군의 태자 夫婁가 夏禹를 塗山에서 보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세 史書를 참조하면 기자의 <홍범>은 곧 부루의 <중경>을 講述한 것임이 분명하다. ...(中略)...


이와 같이 事實을 따라서 참조하여 증명할 수 있는데, 이것이 互證이다.


(3) 追證 : 하나의 사실로 다른 사실을 미루어 짐작하라


<삼국사기> 고구려 榮留王紀에 "唐 황제가 사자를 보내어 京觀을 헐기를 청하였다"고 하였는데, 경관은 곧 戰勝 기념탑이다. 이로써 보면, 乙支文德이 隋를 이긴 뒤에 기념탑을 세운 일이 있고, 당 황제의 요청은 실행되지 않았으므로, 遼陽의 白塔이 곧 그 유물일 것이다. ...(中略)...


이와 같이 이 事件이 있으므로 저 사건이 없을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追證이다.


(4) 反證 : 춘추필법 등의 왜곡된 기록을 통하여 논증하라


...(初略)... 패배한 것을 감추고 이긴 것을 과장하는 것은 중국인들의 공통된 특성이다. 그러므로 <管子>의 "秦夏" 云云 한 것은 管仲이 辰韓과 싸운 齊 桓公의 공로를 한껏 자랑한 것인데, 공자의 <春秋>와 左丘明의 左傳에는 이 일을 적어놓지 않았으니, ...(中略)...

孔氏(孔子)와 左氏(左丘明)는 관중이 攘夷한 공로를 찬미하여 "관중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동이족을 따라서 옷섶을 왼쪽으로 여미어 입고 있을 것이다(微管仲, 吾其爲左衽-<論語> 憲問)"라고까지 한 말을 보면 그 전쟁이 얼마나 위기에 처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中略)...


이와 같이 反面에서 그 사실의 眞을 발견할수 있는데, 이것이 곧 反證이다.


(5) 辨證 : 잘못되고 왜곡된 기록을 변론하라


諡法을 조선에서는 삼국시대 말엽에 비로소 쓰기 시작하였고 중국에서는 周나라 이후에 썼다. 특히 祖, 宗 등 字로 된 諡號는 중국에서도 漢 이후에야 쓰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漢陽奇氏譜 : 箕子를 시조로 모신다>나 鮮于氏의 <先王遺事記>에서는 箕子의 시호를 太祖文聖王이라고 적어 놓았으니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中略)...

寺刹을 불교가 수입된 뒤에 있게 된 명칭이다. 그리고 53佛이 바다를 통해 조선에 건너온 것은, 비록 인도에서 중국을 통해 온 것보다 먼저라 하더라도 이 또한 삼국 初代의 일이다. 그런데도 <여지승람>에서 이르기를 "馬韓의 武康王 箕準이 善花夫人과 彌勒寺에서 놀았다"고 하였고, "武康王陵은 속칭 末通大王陵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불교도 없는데 어디에 사찰, 즉 절이 있다는 말인가. <삼국유사>에 "백제 武王은 이름이 薯童이고 그 왕후는 善花夫人이다"고 하였으므로, 武康王은 곧 백제의 武王이고, 薯는 곧 [마]이니 末通은 곧 薯童이며, 馬韓은 곧 백제의 별명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백제의 왕을 箕準이라 하고, 백제의 왕후를 기준의 부인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中略)...


이와 같은 잘못된 기록들을 변론함으로써 그 정확한 것을 찾을 수 있는바, 이상의 다섯 가지 방법으로 4천 년 동안 이지러지고 빠져 없어진 것들을 채우고, 잘못 전해진 것들을 바로 잡고, 그리하여 그 가운데서 因과 果를 정밀하게 찾고, 공정하게 是非를 가린다면, 조선의 가치 있는 역사를 만에 하나 혹은 천에 하나라도 多勿할 수 있을 것이다.


 ...(中略)... 이 일은 才와 誠와 學力을 겸비한 사람에게 기대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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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양회와 유소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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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덩샤오핑은 다음과 같은 24자로 중국의 외교방침을 정한 적이 있다.


冷靜觀察 站隱踋跟

沈着應付 韜光養晦

善於守拙 絶不當頭

냉정하게 관찰하지만, 본인의 입지는 세우며,

침착하게 응대하고, 힘을 아껴 보존하고,

방어게 두드러지도록 하며, 지도력을 뽐내 나서지 마라.


덩샤오핑이 최고의 실권을 쥐고 있던 70~80년대의 중국의 현실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외교정책이면서, 동시에 가장 무서운 정책이 아니었을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이는 1974년 덩사오핑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한 말에도 잘 드러나는데,



만일 중국이 어느 날 낯빛을 바꿔서 초강대국으로 변하고 세계에 패권국가를 자처하며 곳곳에 인민들을 모욕하고 수탈한다면 세계인들은 마땅히 중국에 공산전체주의라는 모자를 씌워야 하며 그 사실을 폭로하고 반대해야 한다.


라고 하여 중국의 노선을 세계에 개방함과 동시에 이미 그때부터 강대국가들의 견제를 받고 있는 입장에서 몸을 숙이고 있다. 물론 과거의 영광에 비해서 이렇게 중국이 철저히 몸을 낮추고 숙이는 모습이 익숙치는 않지만 마치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이빨을 감추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신중함은 결국 21세기 초반에 와서 중국이 날개를 펴고 비상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유용태 선생님은 항상 입버릇처럼 '우리가 일본에게 직접적인 치욕을 당한 것은 36년뿐이지만, 중국에게는 2천년 동안이나 정신적, 문화적으로 지배를 받아온 것과 다름없다. 가장 무서운 존재는 중국이다.'고 말하면서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도록 주문하셨다. 물론 학자로서 학업에 정진하라는 뜻도 있겠지만, 이미 경제적 지표라던가 사회, 외교, 정치 문제 등에서 중국은 그 잠재력을 드러내고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본인들도 21세기 초가 자기들의 때였음을 알았을까, 후진타오는 2006년 미국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行路難 行路難

多岐路 今安在

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

길이 험하디 험하구나.

수많은 갈림길이 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긴 바람과 거센 파도를 이겨내면 때가 있으니,

돛을 높이 달고 푸른 바다를 건너리라.


이백의 「行路難」이라는 시인데 후진타오가 이 시를 읊은 것은 물론 자기가 아직까지 때를 기다리고 있음을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이제는 오랜 시간 외풍을 이겨냈으니 푸른 바다를 건널 때가 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걸까. 이번에 일본과의 釣魚島(중국명 댜오위다오, 일본명 센카쿠 열도) 영토분쟁에서 보여준 적극적인 중국의 외교정책은 주변 국가들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미국과 유럽에도 긴장감을 선사했다. 겉면으로 보기에는 희토류를 가지고 자원전쟁을 위협해서 일본이 경제적 목적 등을 이유로 양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비단 자원문제 뿐만이 아니라 국가 간의 파워게임에서 중국이 일본을 압도한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던 사건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중국의 외교 정책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有所作爲


뜻하는 바가 있으면 그대로 한다는 뜻으로, 이제는 중국이 국제관계에서 적극적으로 문제에 개입하고 국위를 신장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후진타오 체제에 들어서면서 정립된 방침이다. 불과 30년 전에 자신들의 몸을 낮추며 국제사회에서도 목소리를 아껴오던 중국의 향보가 새삼 궁금해지는 최근의 작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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